다케시마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또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입니다.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점거는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불법 점거이며
한국이 이런 불법 점거에 의거해 다케시마에 대해 실시하는 어떤
조치도 법적인 정당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본은 다케시마 영유권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국제법에 따라
냉정하고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생각입니다.
국제사회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일본의 대응
일본은 영토와 주권을 둘러싼 정세에 대해 국제사회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며 각각의 사안의 성질에 맞춰 적절한 대응을 해왔습니다.
다케시마에 관해서는 다음 사안의 성질과 그에 맞는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다케시마 | ||
사실의 성질 지금까지의 경위 |
영토 문제가 존재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이지만, 한국에 의한 불법 점거가 계속되고 있음.
일한 양국 간에 1950년~60년대에 구상서가 오고 가며 서로 주장을 전달했다. 일본은 두 나라 사이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1954년, 1962년, 2012년에 제안했다. 이에 대해 한국은 제안을 거부하고 있다. |
일본의 대응 |
국제법에 따른 해결을 추구. 한국의 불법 점거에 대해 계속하여 항의. |
▶ 다케시마 소개 책자(PDF) ▶ 다케시마의 지리 등
1: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다케시마 영유 경위
에도시대의 이용과 시마네현으로의 편입
울릉도 및 다케시마 도항 허가와 그 후의 울릉도 도항 금지 상세
일본은 에도시대인 17세기 초에 처음 국가로서 다케시마 이용을 허가했습니다. 에도막부는 쇄국정책을 채택했지만 다케시마 도항은 허가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늦어도 17세기 중반에는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습니다.
- 1618년에도막부는 요나고(돗토리현)의 주민에게 울릉도 도항을 허가.
그 후 다케시마 도항도 허가. - 1693~96년겐로쿠 다케시마 잇켄(竹島一件)
울릉도 도항 금지/다케시마 도항은 금지되지 않음
메이지시대, 다케시마의 시마네현 편입 상세
1900년경부터 민간의 다케시마 이용이 활발해졌으므로 1905년에 일본정부는 각의 결정에 따라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으로 편입하여 영유 의사를 재확인했습니다.
- 1905년 1월 28일각의 결정에 의해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에 편입
계속적인 다케시마에 대한 행정권 행사 상세
관할
- 1905년 5월 관유지 대장에 등록
- 1909년 3월 29일관할 구역을 칙령으로 지정
등기
- 1905년 6월 6일상업 등기
과세 등
- 1906년 3월 1일강치 포획에 과세
- 1906년~관유지 사용료 징수
산업 단속 ・ 인허가
- 1905년 4월 14일강치 포획을 지사의 허가 사업으로 지정
- 1905년 6월 5일강치 포획 허가 감찰을 교부
- 1921년 4월 1일다케시마 김과 미역 채취 허가
- 1936년 6월 6일인광 시굴권을 허가
한국의 주장 상세
- 한국정부의 주장(1)조선 고문헌
- 한국정부의 주장(2)안용복의 도일
- 한국정부의 주장(3)1900년 칙령 제41호
2: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의 다케시마 취급과 한국의 행동
(1)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상세
연합국과 평화조약이 체결되기까지 일본은 점령하에 놓였다.
- 1945년 8월포츠담 선언 수락
일본에서의 움직임
- 1946년 1월행정권의 일시 정지 (1952년 4월 실효)
- 1946년 6월다케시마 접근 금지 (1952년 4월 해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 상세
1947년경부터 미국은 평화조약의 시안 작성을 시작하여 예비적인 협의를 실시하는 동시에 초안을 정리하여 독자적인 초안을 작성한 영국과 협의를 실시했다.
연합국의 움직임
- 1951년미국 초안
- 1951년 4월 25일미영 협의
미영 공동 초안 상세
다케시마가 일본영토라는 인식을 감안한 초안이 작성됐다.
연합국의 움직임
- 1951년 5월 3일미영 공동 초안
한국이 수정을 요청 상세
미국은 다케시마는 한국이 영유한 적이 없으며 일본의 영토라고 회답했다.
한국의 움직임
- 1951년 7월 19일개정 미영 공동 초안에 대해 한국이 미국에 수정을 요청
미국의 움직임
- 1951年8月10日미국이 한국의 요청을 거부 (이른바 러스크 서한)
(2)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서명 ・ 발효와 한국이 취한 행동
평화조약 서명 / 이승만 라인 상세
한국의 조문 수정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케시마=일본 영토임을 확인했다.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국은 강경수단을 발동했고, 미국과 일본 등은 항의했다.
- 1951년 9월 8일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서명
한국의 움직임
- 1952년 1월 18일한국 대통령이 ‘해양 주권 선언’
미국의 움직임
- 1952년 2월 11일해양주권 선언에 대한 미국의 항의
조약발효 / 한국에 의한 불법 점거 상세
일본인의 다케시마 도항이 재개되었음에도 한국측이 방해했고, 해상보안청의 순시선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은 해양경찰대를 파견하여 다케시마를 불법점거했다. 미국과 영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다케시마가 일본영토라는 견해이다.
-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
일본의 움직임
- 1953년 6월~다케시마 도항 재개
- 1953년 7월~해상보안청의 순시선 헤쿠라 총격 사건
미국의 / 영국의 견해
- 미국의 견해:밴 플리트 특명대사 보고서
- 영국의 견해:주일 영국 대사관에서 본국으로의 전보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제안, 한국은 거부 상세
일본의 움직임
- 1954년 9월~한국에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제안
한국의 움직임
- 한국의 다케시마에 관한 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