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시마울릉도 및 다케시마 도항 허가와 그 후의 울릉도 도항 금지

울릉도 및 다케시마 도항 허가와 그 후의 울릉도 도항 금지

1618년

에도막부는 요나고(돗토리현)의 주민에게 울릉도 도항을 허가. 그 후 다케시마 도항도 허가. 자료 1~4

 회조선업에 종사하는 요나고의 주민이었던 오야 진키치(大谷甚吉)와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는 재목과 해산물이 풍부한 무인도였던 울릉도로의 도항을 에도막부에 청원했습니다. 막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오야, 무라카와 양가는 매년 1년 교대로 울릉도에 건너가 사업을 벌였습니다.
 오키에서 울릉도에 이르는 길에 위치한 다케시마는 항행의 목표지점으로서, 배의 중간 정박지로서 또한, 강치나 전복 잡이의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자료 1
다케시마 도해 허가 지령서(사본)

1618년(1625년이라는 설도 있음) 막부가 오야, 무라카와 양가에 울릉도 도항을 허가한 문서(봉서)의 사본.

※울릉도(울릉도와 다케시마의 명칭 및 장소의 일시적 혼란

자료발췌(현대어 역)

伯호키 국(伯耆国) 요나고에서 몇 해 전 다케시마(현재의 울릉도)에 도항했다고 합니다. 이번 요나고의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와 오야 진키치의 도항 청원을 장군님께 여쭙자 승인을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뜻을 받들어 도항 허가의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다케시마 도해 허가 지령서(사본)

1618년(겐나 4년) 소장: 요나고시립 산인역사관

자료 2
다케시마 도해선 문장(아욱문)의 선인(船印)

에도시대에 울릉도와 다케시마에 건너간 오야 집안이 막부로부터 하사 받은 선인의 깃발. 도항할 때 배에 걸었다고 여겨짐.

17세기(추정)
소장: 요나고시립 산인역사관

다케시마 도해선 문장(아욱문)의 선인(船印)
오야 집안이 다케시마에 건너갔음을 나타내는 자료
자료 3
1681년 5월에 오야 집안에 묵은 막부 순견 관리의 질문에 대한 규에몬 가쓰노부의 회답 
(延宝九年酉ノ歳ニ御巡見様御宿申上候覚)

1681년(엔포 9년) 5월에 오야 집안에 묵은 막부 순견 관리의 질문에 대한 규에몬 가쓰노부(九右衛門勝信)의 회답. 현재의 다케시마를 쇼군 이에쓰나의 대, 24,5년 전에 하사하여 강치 포획을 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오야큐에몬가쓰노부 1681년(엔포 9년)
사진은 오야신쿠로카쓰오키 필사 1810년 (분카 11년)

1681년 5월에 오야 집안에 묵은 막부 순견 관리의 질문에 대한 규에몬 가쓰노부의 회답

소장: 시마네현 다케시마 자료실

자료발췌(현대어 역)

겐유인님(도쿠가와가문의 4대손인 장군 이에쓰나를 일컬음)치세, 다케시마(현재의 울릉도)에 이르는 길에 주회 20정 정도의 작은 섬이 있는데 초목이 없는 바위산으로 24,5년전에 아베시로고로님의 중개로 하사하여 도항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강치의 기름을 조금 얻고 있습니다.

자료 4
가메야마쇼자에몬이 오야큐에몬가쓰자네에게 보낸 서한

1660년(만지 3년) 9월의 오야큐에몬에게 보낸 막부의 신하 아베시로고로 집안 가메야마쇼자에몬의 서한. 마쓰시마(현재의 다케시마)도항에 있어 아베시로고로가 막부 관료인 로주의 동의를 얻었음이 기록되어있다.

가메야마쇼자에몬이 오야큐에몬가쓰자네에게 보낸 서한

가메야마쇼자에몬 1660년(만지 3년) 9월
소장: 시마네현 다케시마 자료실

자료발췌(현대어 역)

또한 내년부터 다케시마 중(현재의 울릉도 같은 방향의) 마쓰시마(현재의 다케시마)에 귀하(오야 집안을 일컬음)의 배가 도항한다는 취지의 내용에 대해 시로고로(아베시로고로를 일컬음)는 관료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1693~96년

겐로쿠 다케시마 잇켄 자료 5

 울릉도(당시의 명칭은 ‘다케시마’)를 둘러싼 일본과 조선의 교섭이 있었지만 결렬되어 1696년 1월에 조선과의 관계를 배려하여 막부는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습니다.
 조선왕조는 15세기 이후 조선인의 울릉도 도항 및 주거를 금지하여 이 섬은 무인도가 되었습니다. 1692년(겐로쿠 5년)에 무라카와 집안은 울릉도에서 많은 조선인과 조우했습니다. 그 이듬해인 1693년에 울릉도에 건너간 오야 집안도 조선인과 조우하여 전복잡이를 할 수 없었던 증거로 삼아 그곳에 있던 조선인 2명을 일본에 데려갔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안용복입니다.
 그 후 에도시대에 조선외교 및 무역의 창구였던 쓰시마번은 에도막부의 명령으로 안용복 등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조선에 울릉도 도항 금지를 요구하는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교섭은 결렬되었습니다.
 1696년 1월에 막부는 조선과의 분쟁을 피하고 우호관계를 존중하여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습니다. 반면 다케시마 도항은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로도 당시부터 일본이 다케시마를 자국의 영토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합니다.

  • 1693년오야 집안은 울릉도에서 조우한 조선인 안용복 등 2명을 연행하여 귀국
  • 1693년~일본(쓰시마번)과 조선의 교섭
  • 1696년교섭 결렬
  • 1696년 1월에도막부는 조선과의 분쟁을 피해 울릉도 도항을 금지
    ※ 단, 다케시마 도항은 금지하지 않았음
안용복은 어떤 인물? 지금은 한국의 국민적 영웅
사실은…?
당시의 조선정부는 ‘무지망작의 죄’로 처벌

 한국에서 안용복은 17세기말에 두 번 일본으로 건너가 다케시마가 조선영토임을 인정하게 한 국민적 영웅으로 불리며 울릉도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온 기록은 확실히 남아있으므로 이는 사실이지만, 안용복은 조선왕조가 공도정책을 실시하던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민이었습니다.
 한국의 주장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조선왕조의 기록인 “숙종실록”에 의하면 1697년에 안용복은 조선에 귀국한 후 조사를 받았고, 그 후에 조선 관리는 안용복을 ‘우매한 어민’, ‘바람에 떠도는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표현하며 왕조가 그런 사람을 일본에 보낼 일이 없다고 서술하고있습니다. 또한 조선이 쓰시마 번주 앞으로 보낸 서한을 통해서 안용복의 행동은 ‘무지망작의 죄’에 해당하여 유형에 처했다고 전달되었습니다.

울릉도의 비석

울릉도의 비석
사진: 시마네현 다케시마 자료실


자료 5
울릉도 도해 금지 봉서(奉書)(사본)

막부가 오야, 무라카와 양가에 울릉도 도항을 금지시킨 봉서(奉書)의 사본.


자료발췌(현대어 역)

마쓰다이라 신타로가 이나바, 호키를 다스리던 때에 청원이 있었던 요나고의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와 오야 진키치의 다케시마 도항에 대해 지금까지 고기잡이를 해왔지만, 앞으로 금지를 분부하는 취지의 상의가 있으므로 이해하길 바란다.

울릉도 도해 금지 봉서(奉書)(사본)

“다케시마 지도” 1696년(겐로쿠 9년)
소장: 돗토리현립 박물관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려진 지도
‘고다니이헤에가 보내온 다케시마 지도’

 에도막부가 1696년에 울릉도에 도항 금지를 결정함에 있어 막부는 돗토리번에 울릉도 도항 상황을 물었습니다. 이때 돗토리번은 막부에 회답하기위해 지도를 준비했습니다(왼쪽 지도). 이 지도에는 울릉도(당시의 호칭은 다케시마)와 다케시마(당시의 호칭은 마쓰시마)가 그려져 있습니다. 다케시마는 동서 두개의 섬으로 그려져 동쪽 섬의 해변가에 ‘선착장’이라는 문구와 오두막집의 그림이 보입니다. 실제로 이 섬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정확한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울릉도에 건너간 무라카와 집안이 작성한 그림 등을 바탕으로 그려졌다고 여겨지며, 이런 지도나 문헌을 통해 일본이 울릉도와 다케시마의 존재를 오래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다니이헤에가 보내온 다케시마 지도

‘고다니이헤에가 보내온 다케시마 지도’
소장: 돗토리현립 박물관


고다니이헤에가 보내온 다케시마 지도(부분 확대)

‘고다니이헤에가 보내온 다케시마 지도’(부분 확대)
소장: 돗토리현립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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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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