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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주제 해설

시대 구분 II 다케시마가 시마네현으로 편입된 1905년(메이지 38년) 전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메이지 시대(1868~1912)~1945년(쇼와 20년)

(1) 다케시마 대여 청원과 시마네현 편입

다케시마가 시마네현으로 편입된 경위와 그 소관

※1 ‘을서(乙庶) 제152호’ 시마네현 문서철 ‘다케시마’
※2 ‘37 비을(秘乙) 제337호 내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 ‘공문 유취’

1. 다케시마 강치어업의 활성화

 다케시마는 오키섬의 어업자들에게 오래전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며, 1849년에 프랑스의 포경선(리앙쿠르 호)이 다케시마를 〈리앙쿠르 바위〉라고 명명한 것에 유래하여 현지에서는 다케시마는 리얀코, 랑코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1903년(메이지 36년) 무렵에는 다케시마에서의 강치어업이 활발해져 같은 해 5월, 오키섬에서 사업을 경영하던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郎)(※1)는 다케시마 강치어업을 유망한 사업이라고 생각하여 다케시마에 십수 명을 파견했으며No.13 이듬해 4월에도 하시오카 도모지로(橋岡友次郎) 등과 함께 다케시마에 도항하여 강치를 잡았다No.12.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이시바시 마쓰타로(石橋松太郎) 외에 이구치 류타(井口龍太), 가토 시게조(加藤重蔵) 들도 다케시마에서 강치를 잡았기 때문에 이른바 남획 상태가 되었다.

2. 나카이 요자부로가 다케시마 대여 청원을 정부에 제출

나카이 요자부로가 제출한 다케시마 대여 청원 부도(附圖)(사본) 소장처: 시마네현 공문서센터

 이러한 남획 상태를 우려한 나카이는 1904년(메이지 37년) 9월에 외무대신, 내무대신 그리고 농상무대신 앞으로 다케시마에서 잘 관리가 된 강치어업이 이뤄질 필요성을 호소하며 10년간 다케시마를 대여하도록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했다.

 나카이는 대여 청원서에서 다케시마에 강치가 올라오는 지점이나 어업작업소(漁舎), 선착장 등의 장소를 나타낸 약도 외에 추가 설명서도 붙이고 강치가 남획되고 있는 실정과 그 영향을 설명하면서 자원 보호와 강치 어업 관리를 위한 시책을 제안했다. 또한 문서 말미에는 강치가 올라오는 지점을 빨간색으로, 보호구역을 16개로 나눈 경계선을 점선으로 그린 약도를 첨부했다(오른쪽 그림).

3. 다케시마의 시마네현 편입을 각의에서 결정함

 나카이의 청원을 받은 정부는 시마네현의 의견을 정취한 다음에 1905년(메이지 38년) 1월 28일, 섬의 명칭을 〈다케시마〉로 정하고 시마네현 소속으로 하여 오키도사(島司: 도청의 장) 소관으로 할 것을 각의에서 결정했다No.14.

 일련의 경위는 다음 페이지에 정리하는 바와 같다.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으로 편입하는 것을 각의 결정한 후, 같은 해 2월 22일에 시마네현 지사는 다케시마의 위치, 소속, 명칭, 소관에 대하여 고시하면서No.18 오키 도청에 다케시마의 명칭, 소속과 오키도사 소관으로 할 것을 훈령(지시)했다No.17.

 자료 조사를 통해 각의 안건이 기록된 〈건명록(件名錄)〉에 이 각의 결정이 게재된 것이 확인하였다No.15. 또한 리앙쿠르 바위로 알려진 섬이 시마네현으로 편입되어 그 명칭이 다케시마로 명명된 것을 보도하는 (1905년 7월 19일자 신문 기사)도 확인하기에 이를 같이 게재하는 바이다No.16.

※1 1864년(겐지 원년), 돗토리현 도하쿠군 오가모촌 출생. 규슈, 산인, 호쿠리쿠 등 각지에 살았으며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조선 등에 도항하여 해삼, 전복잡이 등 수산사업 개발에 종사했음. 오키 수산조합으로부터 어업 시험사업도 위탁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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